베트남 호이안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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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유춘몽(酒誘春夢)
베트남의 화려했던 국제무역항, 호이안
오늘 포스팅은 다낭의 남쪽 도시 '호이안'이다.
다낭에서 남쪽으로 30여 km 떨어진 '호이안'은 참파왕국에 의하여 1세기경부터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규모가 큰 항구로 발달하였고, 16세기부터 17세기에는 바다의 실크로드라 불리면서 중요한 국제무역항이 되었다.
가장 번성했던 이 시기에는 화교와 일본인, 인도인, 네덜란드와 프랑스 등 서구의 상인들이 모여들면서 서구적이면서 동양적인 도시의 풍경들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호이안을 흐르는 '투본강'이다.
호이안 구시가지의 중심가로 들어가기 위해 목선으로 제작한 유람선을 타고 둘러보는 투본강 주변의 풍경이다.
잔잔한 강물보다 하늘이 먼저 일렁거렸다.
금방이라도 소나기를 퍼부을 것 같은 검은 구름 사이로 붉은 햇살이 커튼처럼 드리워졌다.
근세기에 들어서면서 가까운 다낭 지역으로 무역항의 기능이 이전되면서 호이안은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러나 16-17세기경에는 1000여 명이 넘는 일본인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고, 여러 나라의 상인들로 북적이며 동서양의 문화가 교류하는 이국적인 도시였다고 한다.
호이안의 구시가지로 통하는 선착장에 내렸다.
쇠락한 항구였기에 오히려 베트남전의 전흔으로 부터도 벗어날 수 있었기에, 지금과 같은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보전할 수 있었다고 한다.
1593년에 일본인들이 세웠다는 내원교와 화교들의 소통 장소이기도 했던 복건회관, 쩐푸거리 등 동서양의 문화가 혼합된 도시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던 덕에 올드타운 전체가 1999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세상에 알려졌고,
도심을 흐르는 아름다운 투본강의 유람선과 함께 밤마다 펼쳐지는 등불축제와 야시장의 몽환적인 분위기가 관광지로 각광을 받기 시작하면서 세계 각국의 여행객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곳이 되었다.
자전거를 개조하여 만든 '시클로'다.
왜소하고 마른 현지인들이 체격이 큰 관광객들을 태우고도 싱글벙글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복잡하도록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과 오토바이 사이를 부딪치는 일도 없이 요리조리 잘도 피해서 시클로를 운전하고 다녔다.
마치 서울의 인사동 거리를 수십 개 합쳐놓은 것처럼 골동품과 예술품으로 넘쳐났고, 거리에는 먹을거리로 가득했다.
구도심의 고풍스럽고 멋스러운 분위기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꼭 한 번은 자유여행으로 여유로운 시간을 가지고 다시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들게했다.
그렇다고 세련된 도시의 모습도 아니었고, 예스러운 시골 동네 같은 모습이면서도 뭔지 모를 아득한 향수 같은 것이 느껴지는 분위기였다.
현재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먼 과거도 아닌, 이국적인듯하면서도 우리네 어디 고향마을과도 같은......
주변의 풍경도, 지나는 사람들도 모두 여유롭고 시간은 멈춘듯한데..... 우리 일행만 바쁘고 분주해 보였다.
패키지여행이었던 것이 후회도 되었다.
다음에 다시 올 수 있다면, 그때는 꼭 자유로운 여행으로 와서 이 오래된 도시의 시간에 맞춰 흐느적거리듯 쉬고 싶었다.
작은 강가에는 고깃배들도 보이고, 이 마을 방식으로 강물에 말뚝을 박고 그물도 걸어 놓았다.
여행자들과 오래전부터 늘 그렇게 살아왔던 현지인들은 다른 시간과 다른 공간을 사용하는 것처럼 보였다.
탁한 강물 건너로 보이는 마을의 풍경이 마치 빛바랜 수채화의 그것처럼 다가온다.
1593년 왜인들이 만들었다는 '내원교'다.
같은 해에 우리나라에선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임진왜란으로 전투가 한창이었고 그 해 3월 한강 하구에선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이 있었다.
왜군들이 우리나라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동안 멀리 남국의 베트남 항구에서는 역시 왜인들에 의해 저런 다리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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